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경관  특색있고 매력있는 생태보존, 문화도시의 사하로 놀러오세요.

감천동  위치가 표시된 사하구 지도

감천동(甘川洞)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감천(甘川)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이며, 감(甘)은「감」,「검」에서 온 것으로「검」은 신(神)이란 뜻이다.「川」은「내」를 말하며, 그 이전에는「內」를 적어「甘內來里」이며, 감내(甘內) 또는 甘來라고 하였고, 다내리(多內里 : 多大 안쪽 마을)로도 불렀다. 감천의 나이 많으신 분 중에는 감천은 물이 좋아서 甘泉 또는, 甘川이라고 했고, 많은 선박들이 옛날에 이곳에 들어와 급수를 받았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이것은「검내」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감천은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살았던 지역으로 추측되며, 고인돌(支石墓)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소도(蘇塗)와 같은 신역(神域 : 聖域)으로 추측된다.

감천동은 천마산(天馬山), 장군산(將軍山), 금티산(金峙山)이 병풍처럼 우뚝 솟아 있고, 감천항을 두송반도(頭松半島)가 길게 뻗어 내려 감천만(甘川灣)이 깊숙이 들어가 천연의 항구가 된 마을이다. 따라서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입지 조건을 갖추었으며, 고인돌 6기(基)의 발견은 청동기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었고,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이곳에서 지배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인돌은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이 2기, 변형적 고인돌이 3기, 표석식(標石式)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 1기 등으로 종류가 다양해 시대적인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져 감천에 고인돌이 영위된 청동기 시대가 퍽 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부터 삼천년 전쯤부터 북쪽에서 들어 온 청동기 문화는 앞서 신석기 시대에 이곳 주민이 바다에 가까운 곳에 살았던 것과는 달리 산비탈에 살며, 땅 위에 집을 짓고 취락을 이루어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벼도 재배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청동기 문화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철기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농업의 생산력이 급속하게 발전하여 부족 국가가 곳곳에 생겼다. 감천동의 고인돌은 위와 같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며, 제1~3호는 부산화력 발전소 사택촌 앞 도로를 따라 있었다.

제1호에서는 마제석검(磨製石劍) 1점이 출토되어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2, 3호는 도로공사를 하던 중기(重機)에 밀려 파괴되었고, 상석(上石)은 도로 밑에 묻혀 버렸고,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4호 역시 구도(舊道) 서쪽 밭 가운데 있었으며, 마을에서 옛날부터「복(福)바위」라고 불렀고, 이 바위를 건드리면 복이 나간다는 전설 때문에 잘 보존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공장을 세우게 되어서 발굴 조사되었으나, 유물은 없었다.

제5호는 해변 서북쪽의 산기슭에 산에서 흘러내린 흙에 묻혀 上石만 보였었는데, 택지 조성으로 파괴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2단병식(二段柄式) 마제석검(磨製石劍) 1점이 채집되었다. 이 석검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제6호는 현재 버드나무집 식당(食堂)의 뜰에 있으며, 지주(地主)가 잘 보호하고 있다. 완전한 형태의 남방식(南方式) 고인돌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유래 등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조사가 되지 않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단 하나뿐인 고인돌은 마을 주민을 비롯하여 부산시민 모두가 잘 보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인돌의 주변에서는 김해식토기편(金海式土器片)과 우각형(牛角形) 손잡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제1호 동남쪽 산기슭에서 석구(石臼)가 하나 출토(出土)되었고 주변에서 토기편이 발견되었다. 그외 마제(磨製) 유구석부(有溝石斧) 1점, 마석촉 1점, 석착(石鑿) 1점 등이 발견되어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중에서 유구석부는 농경문화(農耕文化)와 밀착된 석기로 한반도의 남부에만 보였고, 북부지방에서 출토된 예는 없다. 이 유적 가까운 밭가에서 가야초기의 옹관장이 1기 발견되었고, 부산화력발전소 사택을 건축하기 위해 택지공사를 하던 중 가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돌널무덤(石棺墓) 10여기가 파괴된 일이 있었다.

삼성여자고등학교 동남쪽 일대에서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많이 나왔는데, 어떠한 건물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옆 남쪽에는 고려 청자편(靑磁片)이 많이 출토되는 요지(窯地)로 추측되는 곳이 있었다. 소문(素文)이지만 시유(施釉)가 좋은 편이고, 색조는 암촉색이다.

감천은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자주 왜구의 침략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산포와 가깝고 다대포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왜구의 침입으로 몇 번인가 마을이 패촌이 되다시피 했다. 조선 시대에 감천은 천마산성(天馬山城)과 서평포진(西平浦鎭) 사이에 깊이 들어간 감천만에 위치한 요지로 바다에 출입하는 배와 사람들을 검문하는 수문(守門)과 공청(公廳)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때는 괴정과 함께 목마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그 건물은 해방 후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 : 國軍의 前身)에서 쓰다가, 6ㆍ25동란 때에는 영국군 부대가 사용하였다.

감천만의 동쪽 해변에는 재래의 작은 어촌이 있어 감천의 원래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북쪽 해변은 해수욕장으로 쓰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감천 해수욕장은 규모가 좁고 사장이 없으나, 큰 소나무들이 줄 서 있고, 깨끗한 자갈밭이 깔린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그러나 1962년 이곳에 부산화력발전소 건설을 시작하면서 해수욕장과 그 앞에 있는 용두섬이란 작은 섬이 없어지면서 감천의 모습이 바뀌었다. 감천 2동에는 태극을 받들며 도를 닦아 성인이 된다는 신흥 종교인 태극도를 믿는 사람들이 한 사천여명 모여 집단촌을 이루어 1958년 감천2동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신자들이 이 곳에 그들의 신앙촌을 만든 것은 부산으로 피난 온 전국의 그 신자들이 교주를 중심으로 하여 모여든 6ㆍ25 전쟁 기간 동안의 일이다.

감천동에 있는 화력발전소는 1964년에 한국전력에서 미국의 한 건설회사에 공사를 맡겨 세웠으며 그을음을 엄청나게 내뿜어 인근 주민들이 공해에 시달렸다. 이에 한전에서는 주민불편사항을 해소하고 부산지역의 안정적 전력보급과 주변지역 대기환경영향을 고려하여 기존발전소를 헐어내고 청정연료인 LNG를 사용한 135만kW급 복합화력발전소를 건설하였다. 부산 화력발전소가 생긴 뒤에 감천의 바닷가에는 횟집을 비롯한 유흥업소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감천항은 부산항의 보조항으로서 지난 1979년부터 종합개발공사를 시작하여 전용부두화 화물항으로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으며, 감천항 배후도로 공사가 완료되었다.

감천동은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감내 또는 감천이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16)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감천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는데, 1942년 부산부 구역 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7년 구제 실시에 의하여 서구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1월 21일 부산시 조례 제156호의 동제 개편에 의하여 감천동을 갈라서 감천1동과 제2동으로 나누었고, 1983년 12월 사하구 승격과 함께 사하구에 속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담당자
문화관광홍보과 (051-220-4082)
최근업데이트
2024-01-10